사라지는 10억 배럴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막힌 지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세계 석유 시장에서 증발한 공급량은 10억 배럴이 넘는다. 모건스탠리 추산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25일까지 전 세계 석유 재고는 하루 평균 480만 배럴씩 줄어들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집계한 분기별 감소 기록을 가뿐히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 정도 속도는 사실상 전례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원유가 전체 감소분의 6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정제유다. 단순히 원유만 줄어든 게 아니라 휘발유와 경유 같은 완제품까지 동시에 빠지고 있다는 뜻이다. 시장이 한쪽에서만 출혈하는 게 아니라 전방위로 피를 흘리는 셈이다.
JP모건의 경고선
JP모건의 분석가 카네바는 이번 사태를 두고 꽤 무거운 경고를 내놨다. 호르무즈 해협이 6월 초까지 다시 열리지 않으면 OECD 국가들의 재고가 다음 달 초에 '운영 스트레스 수준'에 도달하고, 9월에는 '운영 최저선'까지 떨어진다는 것이다. 운영 최저선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송유관과 저장 탱크, 수출 터미널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량을 의미한다. 그 아래로 떨어지면 시설 자체가 제 기능을 못한다.
물론 일부 분석가는 JP모건의 예측이 다소 비관적이라고 본다. 수요 감소가 더 크게 일어나면 압력은 줄어든다는 논리다. 그러나 비관론과 낙관론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미국 전략비축유의 딜레마
미국은 약속한 1억 7,200만 배럴 가운데 7,970만 배럴 정도만 풀었다.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유는 단순하다. 다 풀면 미국 전략비축유(SPR)가 1982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다. 시장에 공급을 충분히 흘려보내야 한다는 압박과, 자국 비축분이 바닥나면 안 된다는 부담 사이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셈이다.
미국 내부 사정도 좋지 않다. 증류유 재고는 2005년 이후 최저고, 휘발유 재고는 2014년 이후 같은 시기 기준 가장 낮다. 사실상 '세계의 마지막 공급자' 역할을 떠맡으면서 자기 곳간부터 비워가고 있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우려스럽다. 미국이 무너지면 대안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버틸 만한가
흥미로운 건 아시아의 상황이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지만, 중국과 한국의 재고는 오히려 여유가 있다고 한다. 그동안 자제했던 정제유 수출 재개를 검토할 정도다. 싱가포르 연료 저장 허브의 재고도 계절 평균을 웃돈다. 평소 비축 노력이 빛을 발한 결과로 보인다.
다만 안심하긴 이르다. 호르무즈 해협이 6월 초까지 다시 열리지 않으면 일부 아시아 국가는 경유 부족으로 거시경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유럽도 한 달 정도 더 버틸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이 위기는 시간 문제일 뿐,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가장 골치 아픈 대목은 따로 있다. 해협이 재개된다고 해도 시장이 곧바로 안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비어버린 비축분을 다시 채우려는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또 한 번의 가격 압박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 미국 에너지 기업 임원은 "지금의 재고 감소 흐름이 몇 달 더 이어진 뒤, 장기적으로는 재축적 국면이 따라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쟁이 끝나도 시장이 평상시로 돌아가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번 사태가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이것 아닐까.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이 생각보다 훨씬 얇은 막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 그 막에 한 번 구멍이 나면, 메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우리는 지금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